산행여행/뿌리여행

뿌리여행(12): 북촌에서 아리랑고개 넘어 정릉 20리 길

맑은공기n 2018. 8. 20. 11:27

1960년대 종로구 원서동 휘문 중고교(현재 계동 현대건설 자리)를 다닐 때 꽃피는 따뜻한 봄이나 하늘 높고 바람 소슬한 가을엔 방과후 성북구 정릉동 집 까지 곧잘 걷곤 하였습니다.

 

60년 가까운 그 시절엔 시발택시나 군용 짚들이 아주 가끔 먼지 날리며 지날 뿐이었고 한국이 산업화되기 전이라 미세먼지 같은 공해도 없어 8km 가까운 길을 쾌적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창덕궁 궁궐과 이웃한 고전적 분위기 빨간 벽돌 교사로 지은 북촌 휘문중고로 부터 당시 부촌인 혜화동 지나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골골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밤이면 반딧불 형형한 북한산 자락 정릉 집 까지 세 개의 성격 다른 동내를 지나는 서울 속 20리 길 이었습니다.

 

관상감 관천대:

휘문중·고 은사이신 황진락 역사 선생님으로 부터 조선시대 천문 관측대라는 가르침을 듣고 휴식 시간에 관천대 돌덩이를 관찰하다가 아무리 살펴봐도 별을 관측했다는 사실을 찾을 수 없어 주위만 빙빙 돌며 불가해하다 다음 수업시간에 늦은 적도 있었습니다과목과 선생님 성함은 기억이 안 나는데 수업 시간에 늦은 이유를 말씀드리니 질책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창경궁 전쟁과 평화:

장엄한 궁궐을 일제가 동물원과 유원지로 만들어 조선왕조를 모욕한 현장이었지만 중학생들에게는 놀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정릉동 숭덕국민학교에서 입시 치르고 함께 입학한 미아리 살던 이종식군과 이름 잊은 또 다른 친구 합쳐 셋이 집으로 가다 동물원 호랑이 구경한 기억이 나는데 두 친구는 고등학교는 미아리에서 가깝다고 경동고로 진학했습니다 

 

뜨거운 햇살 피해 창경궁 홍화문 그늘에 평화롭게 앉아 어린 아들들에게 이국문화 교육중인 일본인 관광객 너머로 6.25 전쟁 직후 한강에서 건져 올려 홍화문(弘化門) 앞에 전시하던 북한군 T34 탱크 해치에 상체 내민 적병을 대검으로 공격하는 국군 병사의 비장한 모습을 형상화한 애니 인형이 머릿속에 오버랩 되었습니다.

 

동도극장 밀크커피:

혜화동에서 아리랑고개나 미아리고개로 가려면 동도(東都)극장을 반드시 지나야했습니다. 재개봉관 이었고 나중에는 3류 극장인 동시 상영관으로 등급이 하락했지만 미아리고개에 미도극장, 명륜동에 명륜극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성북구 주민들에게 사랑받은 극장이었습니다.

 

중학생 이던 추운 겨울 날 아버지와 함께 OK목장의 결투를 관람하고 부속 다방에서 밀크커피를 마신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기에 원두커피 보다는 그 시절 다방커피 맛에 가까운 믹스커피를 좋아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아련한 추억이 동도극장 옛터를 다시 찾아오게 한 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촌 가게와 고가구점 이외에는 너무 많이 변해 극장 위치가 감이 잘 안 왔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옛 동도극장 건물에 우리은행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부속 다방 건물은 피트니스 센터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리모델링으로 잘려나간 동도극장 건물 뒤에서 주차장 관리하는 연배 비슷한 분에게 물어보니 동도극장 건물과 터가 맞으며 본인도 소싯적 여기서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해서 미소를 교환했습니다.

 

아리랑고개 별리:

휘문학교로 부터 아리랑 고개까지는 십 오리 길 6km로 슬슬 피로감도 오기 시작하지만 어느 날 고개 아래에서부터 냉차장수 포차 밀어주었다고 답례로 고개위에서 얻어 마신 업장(業障)도 녹일 냉차 한잔 시원한 맛은 지금도 혀에 감돌고 있습니다.

 

북한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이후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스카이웨이를 개설하며, 차 한대 다닐 정도의 가파른 흙길을 4차선 넓은 길로 확·포장, 높이도 잘라내 지금 같은 말끔한 길이 되었습니다.

 

정릉고개가 아리랑고개라는 명칭을 갖게 된 유래는 춘사 나운규 선생이 무성영화 아리랑을 촬영하며 마지막 압권인 주인공 영진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간 장면을 연출한 장소가 아리랑 고개라고 하며 1997년 영화의 거리로 지정되고 고개에는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가 있습니다.

 

50년대 말 단성사에서 아버지와 함께 김소동(金蘇東)이 리메이크한 아리랑을 관람하며 주연 장동휘의 신들린 연기에 깊은 인상 받은 적도 있어 감회가 깊었고 아리랑고개를 내려가면 팔구라는 동내입니다. 지번 89번지 그대로 팔구라고 불려오고 있는 일제 때 건축업자들이 개발한 미니신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네 앞에는 경전철 정릉역이 들어섰고 정릉천 건너엔 모교 숭덕초교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내부순환로를 개설하며 정릉천은 복개되어 고가도로 아래 정릉교회와 퇴색 된 좁은 골목 안 드문드문 남아있는 낡은 집 몇 채, 팔구 상호 연탄가게에서만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고개 아래 팔구는 숭덕초교 동기로 휘문중학에 같이 입학했다가 농구특기생으로 광신상고로 진학한 이건상군이 살던 곳으로 고교 때까지는 통학 버스에서 마주치거나,  또는 팔구 이건상군 집에서도 만나곤 했는데 제가 강동구로 이사해 가며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정릉 옛집 솔향기:

아리랑고개에서부터 북한산 연봉들을 바라보며 약 오리 길을 걸으면 정릉3동 집이었습니다. 큰 길보다는 뒷길로 다녀야 옛 추억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대로(大路)를 버리고 좁은 골목 길 같은 퇴락한 구도(舊道)로 들어섰습니다.

 

정릉동사무소와 지금은 사라진 냇가 약수터 지나면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무성한 솔밭이 있었습니다. 솔향기 날아오기 시작하면 이제 집 가까이 도착했다는 편안함을 느끼던 곳이었는데 솔밭은 주택들로 채워지고 소나무 한 그루만 겨우 남아 엣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집 가까이에는 논이 있어 해 긴 날엔 메뚜기 잡아 풀줄기에 꿰고 맑은 정릉천에서 미역 감으며 놀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국선도 단전호흡 수련할 때 배운 화기(火氣)를 내려 보내고 신장의 수기(水氣)를 강화하는 수승화강(水昇火降) 원리를 모르면서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폭염 속 힘들게 다시 찾은 정릉 옛 집은 아직도 오래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고교,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 후 몇 년 모두 합쳐 15년 가까이 기쁨과 슬픔 가족사를 간직한 집이니 낡은 지붕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졸졸 흐르던 개울은 모두 복개되어 흔적도 없고 논두렁과 이웃 집들도 다가구, 다세대 주택들로 변신하고 있었지만 머리 위 북한산 연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노인이 되어 옛 집 찾아온 나의 하얀 모발 보다 인수봉은 더욱 신비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대한민국 고난의 시절인 1950~60년 대 정릉동의 전원풍(田園風) 자연 환경과 북한산 연봉이 쏟아낸 강한 에너지는 소년의 성장에 유()함과 강인(强忍)한 성격을 함께 갖는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정:

13:20 북촌 휘문고 구교지

14:07~14:35 동도극장/3.2km

15:10 아리랑고개/5.90km

15:18 정릉역/5.96km

15:40 정릉3동 옛집/7.76km

 

 북촌입구 옛 휘문고 정문앞:

 

 

 

비원:

 

 

일본인 관광객 가족:

근정전:

 

 

 

 

명륜극장의 변신:

 

혜화동 로터리:

 

혜화문:

 구동도극장 주변 가게들: 

 

 

 

구동도극장 건물 전면:

동도극장 뒤편 하천:

돈암동:

 

 

 

 

성신여대입구역:

신흥사,흥천사 입구 숙부님 옛집 터_ 한옥에서 양옥으로 변신:

아리랑고개 입구:

 

정덕초교(옛날 시내버스종점 터):

 

아리랑고개:

 

 

 

 

 

 

 

 

 

 

팔구 이건상군 옛 집 골목:

 

경전철 정릉역:

안남미 배급해준 옛 정릉동사무소:

뒷길:

어렵게 살아 남은 정릉천: 

과거 솔밭에 남아 있는 소나무 한그루:

 

다세대,다가구로 변신하는 옛 이웃 들:

아직도 남아있는 소년시대 정릉 옛집(1950년대 후기 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