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龍仁旅行

龍仁旅行(42): 용인중앙공원의 독립지사 석농(石儂) 류근(柳瑾)선생(上)

맑은공기n 2018. 8. 31. 20:03

 

용인은 충절 면면(綿綿)한 고장으로 고려 고종19(1232) 몽고 침입 때 승려 김윤후가 몽고 장수 살리타이(撒禮塔·눈 쌓인 봉우리)를 처인성에서 무찌른 역사적 사실부터 1945815일 광복까지 외세에 항거한 정신은 스러질 줄 몰랐습니다.

 

철종12년 양지군 주서면(용인시 처인구 마평동)에서 탄생한 석농(石儂) 류근(柳瑾) 선생(1861~1921)은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교육·종교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신 큰 행적에 비해 덜 알려진 독립지사이십니다.

 

선생의 묘소는 용인시 공원녹지과에서 정성껏 관리하는 용인중앙공원 경건한 분위기 충만한 현충탑 동편 아래 산록(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산37-20)에 정중히 모셔져 참배객들의 발길이 조용히 이어집니다.

 

산지형 공원 가운데 우뚝 솟은 노고봉<(老鼓峰) 노구봉(老龜峰) 209.5m>을 중심으로 명지대학 까지 최장 2.7km 등산로도 있어 건강을 위해 새벽부터 산책하는 사람들과 등산객들, 그리고 참배인들 까지 끊이지 않는 명소(名所)로 용인정(龍仁亭)에서는 시원한 풍광도 덤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 석농선생 묘소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산37-20

    현충탑 주차장에서 240m  아래 도로변 

 

                                                  류근(柳瑾) 선생 연보(年譜)

별호 석농(石儂)

공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셔 별호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고 무던함을 뜻하는 돌놈(石儂)”이라고 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편하게 부르게 하셨으니 근엄하고 서릿발 같은 선생의 기상 한 편에 대중과 어울리고 사랑하는 따뜻한 성품을 간직했음을 엿보게 합니다.

 

용인에서 탄생

향리에서 한학 공부를 했으며 189434세에 상경, 탁지부 주사로 일하다 아관파천(1896)으로 개화파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독립협회 가입과 언론, 교육, 고전 편찬, 대종교 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완성

38세인 1898년 남궁억등과 황성신문을 창간, 19051118일 장지연이 을사늑약을 폭로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끝맺지 못하고 격분하여 쓰러지자, 공이 그 후반부를 작성하여 검열도 받지 않은 채 배달,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했습니다.

 

휘문의숙 숙장 역임

1905년 민영휘가 설립한 출판사인 휘문관(徽文館)에 교육부, 편집부 및 인쇄부를 병설·설립 한데 이어, 46세인 1906년 휘문의숙(徽文義塾·현휘문중고교) 숙감(塾監)3(1907~1908) 숙장(塾長·교장)으로 개화기 교육에 헌신하셨습니다.

 

대한협회(大韓協會) 발기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대한자강회를 재정비하여 국민을 개화·교도한다는 취지로 190711월 남궁억, 오세창등과 대한협회를 발기하셨으나, 국권 피탈 후인 1910년 해체되었습니다.

 

역사서 편찬·발간

조선광문회 출판사업 전후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신정동국역사>(1906), <초등본국역사>(1908), <신찬초등역사>(1910) 등 역사서를 편찬, 발간하셨습니다.

 

조선광문회 출판 구국

50세인 1910년 고전을 발굴, 그 가치를 지식인들에게 재인식시키기 위해 최남선이 조직한 고전 연구기관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참여로 민족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연구를 지속시킬 수 있는 토양이 됐습니다.

 

조선의 옛 문헌 중 <동국통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등 역사서와 <택리지> <훈몽자해> <용비어천가> <산림경제> <열하일기> 등 모두 22권의 중요한 책들을 간행했습니다.

 

신자전(新字典)> 발간

55세인 1915125일 발행된 근대적 출판형태를 갖춘 최초의 한문자전인 <신자전(新字典)> 발간을 주관하셨습니다. 조선광문회 출범과 함께 시작되어 5년이 걸린 방대한 작업으로 훗날 조선어학회 우리말 큰 사전편찬의 모태가 된 국어사전 편찬준비도 하셨습니다.

 

민족종교운동 대종교 입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를 조선의 정신적 식량으로 간주하고 공 49세인 1909년 대종교에 입교하셨으며, 대종교 정교(正敎)191933.1운동이 일어나자, 4월에 전국13도 대표가 모여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대종교 대표로 참석하셨다가 일제에 검거됐습니다.

 

선생과 조선광문회 활동을 함께한 김교헌은 나철에 이어 대종교 2대 도사교(都司敎·교주)1920년 청산리 대승으로 유명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김교헌의 대종교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조직이었습니다.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 민족운동

1915년 김성수(金性洙)의 중앙학교(中央學校)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시다가 공 57세인 1917년 박중화(朴重華안재홍(安在鴻) 130여 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됐습니다.

 

동아일보 창간과 제호

중앙학교를 경영하던 인촌 김성수는 교육사업 전념을 위해 3.1운동 이후 신문창간 권고를 고사했지만, 민간신문 발행이 시급한 과제라며 적극 권유하는 평소 존경해온 공의 의견에 동의, 1919109일자로 총독부 경무국에 신문발행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공은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려면 시야를 넓혀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동아시아 일원으로 보고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신문 제호를 동아일보(東亞日報)라 명명하셨으며 60세의 노령으로 1920년 동아일보 편집고문으로 양기탁과 함께 취임하셨습니다.

 

서거

잦은 투옥과 숙환으로 공은 192152061세의 일기로 서거, 525일 동아일보사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용인 선영에 안장하였습니다.

 

국내 사회와 언론계에서는 공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도회가 이어져 상해 임시정부도 추도식을 거행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23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증했습니다.

 

고난의 대물림

공 서거시 독자(獨子)인 류년수(柳年秀) 옹은 안동감옥에 수감되어 계셨습니다.

 

동아일보(1921522) 1면 기사 보도;

오호석농선생(嗚呼石儂先生) “독자 년수(年秀)군이 독립운동의 관계로 잇서 선생의 병상에 림종치 못함이 옥중의 효자에게는 더욱 유감이며”.

 

공의 증손인 류기철(柳基哲)님은 대부분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그렇듯 유소년시절 녹녹치 않은 환경에도 고려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농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나 뜻한바 있어 귀향, 처인구 원삼면에서 농원을 운영하며 한국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자료 출처: 독립지사석농류근(獨立志士石儂柳瑾류병희 감수, 류기송 편, 전주류씨 계운공파 종친회

                    휘문교우회 동연록(同硯錄)

 

일정:

11:07 용인공용버스터미널 출발

11:18 용인중앙공원 입구(미르광장) 0.33km

11:22~11:30 현충탑/0.69km

11:39  노고봉 용인정/0.92km

12:26  현충탑 주자창/1.15km

12:28~12:33 (태성고 방향) 류근 선생 묘/1.39km

12:40 태성고(노고봉 등산로 입구 안내판)/2.08km

12:46 태성고 버스승차장/2.28km

12:53 용인공용버스터미널 회귀/2.98km 

 

 

휘문중고교 역대교장(숙장)

 

 

미르광장입구:

 

 

 

 

 

 

현충탑(주차장)에서 노고봉(용인정) 230m

 

 

 

 

용인정에서 명지대는 다음 기회에

용인정에서 현충탑(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와

태성고 방향으로 하산

240m 내려오면 석농 류근선생 묘소 입구 

 

 

 

 

 

 

 

 

 

 

 

 

태성고로 내려가는 길

 

태성고 후문 직전 노고봉 진입로

태성고

 

쌩쌩한 대우 프린스

내려온 길

현충탑진입로

 

충혼마당~팔각정(용인정)~충혼마당(현충탑) 왕복, 류근선생묘소 주차장 아래 빨간 둥근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