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沃川旅行(49): [제73주년 광복절 특집] 을사늑약 항거, 마지막 상소한 송병찬 선생

맑은공기n 2018. 8. 22. 16:51
[제73주년 광복절 특집] 을사늑약 항거, 마지막 상소한 송병찬 선생
  • 이안재 기자
  • 승인 2018.08.16 23:17
  • 호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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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용목리 거주 추정
국권회복 요구 자결한 송병선, 송병순 순국선열과 사촌형제
2012년 천안공원으로 이장돼 안장된 송병찬 선생의 묘소.
2012년 천안공원으로 이장돼 안장된 송병찬 선생의 묘소. <사진제공: 남기화씨> 

광복 제73주년을 맞은 올해 그동안 그늘에 가려졌던 옥천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실천했던 송병찬(宋秉瓚, 1837~1907) 선생의 행적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아울러 을사늑약 체결 당시 옥천을 중심으로 부당성을 전파하는 등 실질적인 행동에 나선 행적도 확인돼 구국혼이 살아 숨쉰 고장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송병찬 선생은 1837년(조선 헌종 3년)에 태어난 조선 말기 문신으로, 송시열 선생의 9세손이며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실질적으로 빼앗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인물이다.

 한국학중앙연구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송병찬 선생의 거주지가 옥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아버지는 송달수(宋達洙)로, 선생은 1874년 진사시 합격에 이어 1891년 증광시 갑과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과거 장원급제 후 진위, 과천, 직산 등의 현감을 거쳐 대사간, 호조참의, 부호군, 대사성, 동부승지에 이어 종2품 궁내부특진관(조선 말 궁내부(宮內部)에 딸린 벼슬. 고종 32년(1895)에 설치되었으며, 전례(典禮)?의식(儀式)에 관한 일을 포함해 왕실 사무에 대한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았다)을 역임하다 을사늑약을 맞았다.

 일제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이라고 불린 친일파 대신들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정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이를 반대하는 상소가 이루어진다. 일제의 국권침탈을 두고 전국 각지에서는 민영환 선생 등 자결로 항의하는 순국선열이 잇따랐다.

 송병찬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옥천으로 낙향했다.
낙향한 선생은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1살 위 사촌형인 송병선 선생이 고종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한 후, 윤철규라는 경찰 관리에 의해 강제로 대전으로 이송되는 등 부당한 행동을 당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윤철규의 처벌과 을사늑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했다.

 선생이 올린 을사늑약 폐기 요구 상소는 1906년 2월18일 행해 것으로, 1905년 11월18일 법부대신 이하영을 시작으로 민영환, 이상설, 최익현 등의 상소를 합해 전국에서 올린 45명의 상소 중 마지막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을사늑약 반대 상소는 송병찬 선생에 앞서 그해 2월3일 옥천 유생 정석채(鄭奭采) 선생도 한 것으로 알려져 당시 을사늑약을 맞이한 옥천 지역 유림의 반응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으로 꼽히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항거하며 자결한 송병선 선생은 양산면(당시 옥천 행정구역)에, 1912년 강제 한일병합에 항거해 자결한 송병순 선생은 학산면(당시 옥천 행정구역)에 거주했는데 이들은 둘다 송병찬 선생의 사촌형제였다.

  이같은 선생의 행적은 송병찬 선생의 외고손자인 남기화(경기도 용인 거주)씨의 추적과 자료 수집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남씨는 "어릴 적 어머니께서 송병찬 고조부께서 군북면 용목리에 거주하셨으며,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분이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사촌형제인 송병선 선생이 고종황제께 상소를 올린 후 부당하게 대전으로 이송된 과정에 윤철규라는 을사오적의 하수인이 관계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을사늑약의 폐기를 요청한 마지막 상소였다"고 정리했다. 남씨는 또 "대쪽같은 선비정신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지적하셨던 외고조부께서 동학을 가장한 폭도들의 행패로 병이 나서 1907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http://www.ok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