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沃川旅行

沃川旅行(48): 잊혀진 옥천 선비 송병찬

맑은공기n 2018. 8. 17. 17:06

8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을사늑약(乙巳勒約)에 항거한 잊혀진 옥천의 선비 송병찬(宋秉瓚 1837~1907)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190511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 강제체결 이후 고종실록을 일자(日字)별로 검색해 보면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지사(志士)들은 19051118일 법부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을 시작으로 민영환, 이상설(헤이그 밀사), 최익현 등의 상소를 거쳐 다음해인 1906218일 종2품 송병찬(宋秉瓚)이 올린 상소를 끝으로 불과 45인에 그쳤으며 고종황제는 한일 협상조약(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한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조령(詔令)을 내리는 해괴한 일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 고종실록 46, 42(1905 을사/대한 광무(光武) 9) 1128

 

한국학 중앙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190511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송병찬은 울분으로 사직하고 옥천으로 낙향하셨습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집필자] 이은영: 송병찬(宋秉瓚, 宮內府特進官)에 대하여

실록에 따르면 송병찬의 상소는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마지막 공식 기록으로, 상소의 핵심은

1) 을사오적 처단

2) 을사늑약 폐지

3) 하수인 경무사 윤철규 처벌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는 대전에서 한양으로 올라와 고종황제와 백성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놓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종형(從兄) 송병선(宋秉璿 1836)을 항거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대전으로 내려 보낸 을사오적의 주구(走狗)입니다.

 

그러나 을사오적 하수인 윤철규 처벌을 요구한 겨우 6일 후 충청북도 옥천군을 관장하는 관찰사로 윤철규가 영전, 부임하게 되었으며 이어 동학을 위장한 흉적들에 의한 가택침탈 이라는 핍박이 벌어졌고 외고조부님은 1907. 5. 07 일 돌아가셨습니다.

* 고종실록47: 고종 43(1906 병오/대한 광무(光武) 10) 224(양력)

경무사(警務使) 윤철규를 충청북도 관찰사에 임명

 

윤철규가 신임 관찰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에 당신과 가족들에게 닥쳐올 먹구름과 고난, 망국으로 가는 조선의 앞날을 예측하고 계셨을 거라고 추측되었습니다.

 

종제(從弟)인 송병순(宋秉珣 1839)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충복 영동에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주도했던 -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민영기, 권중현 - 오적(五賊)을 성토하는 격문(檄文),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유림에게 선포 국권회복을 호소하여 의병활동의 촉진제가 되었으며,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恩賜金)으로 회유하려 하자 이를 거절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셨습니다.


대전 동구 용운동에는 송병선·송병순애국지사 형제를 기리는 사당인 문충사(文忠祠)가 있으며 두 분은 큰아버지인 송달수(宋達洙)옥천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연배가 비슷한 송병찬(宋秉瓚_ 宋達洙)과는 사촌 형제이자 동문수학(同門修學)입니다.


마음만 먹었으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우국(憂國)의 험난한 길을 택하신 송병찬, 송병선. 송병순 사촌 형제분들의 선비정신에 깊은 경의를 올립니다.

 

외고조부님 송병찬의 묘는 2012511일 옥천 이원에서 천안시 광덕면 천안공원묘원으로 이장 봉안하였습니다.

  

옥천신문 2018. 8. 10


기고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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