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글 남용우
1960. 09
『틈만 있으면 나는 조그만 시집(詩集)을 끼고 정릉 산골짜기로 나간다. 나에겐 이보다 더 즐거운 휴식이 없다.
그러나 미아리 고개를 넘어 정릉 쪽으로 꼬부라지자 버스기 유난히 까불거린다. 나는 늘 여기를 지날 때면 눈쌀이 찌프려진다. 도로가 잘 닦여 있지 않아 차가 까부는 것쯤은 괜찮다. 차가 지날 적마다 일어나는 먼지로 차 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금방 지나가면 그만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가에 사는 사람들은 허구한 날 그 먼지를 어떻게 감당해 나가는지 남의 일이지만 딱한 노릇이다.
지붕엔 하얗게 먼지가 쌓여 있다. 판장도 대문도 하얀 먼지로 덮여 있다. 그래도 애들은 이 먼지 속에서 다름없이 놀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를 지날 적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중간쯤 들어가 어떤 길갓집 담을 따라 죽 피어 있는 해바라기꽃이다.
해바라기꽃이 그 집 울타리보다 훨씬 높게 나란히 피어 있다. 그러나 이 해바라기꽃들도 먼지에 덮여 모두들 비참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화려한 위엄을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는 해바라기가 그처럼 시들어진 것을 보면 나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그 집 주인들도 필시 그 꽃과 같이 시들어졌으리라 생각하며 쓸데없는 동정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느 다감(多感)한 문학소년이 정릉 청수장으로 놀러가다 혹시 우리 집 해바라기를 보게 되면 위와 같은 글을 쓸지도 모른다. 이 해바라기가 있는 집이 바로 우리 집이다.
정릉 후생주택이 처음 완성되어 아직도 사람이 들지 않은 빈 집이 많은 때였으니까 하필 이런 길갓집 아니라도 되었을 것이지만, 불과 얼마 안 되는 돈의 차이로 이 집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 요컨대 싼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처음엔 울타리가 없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환경이 조용하고 깨끗하였다. 그러나 아리랑고개로 해서 가던 정릉 버스가 미아리고개로 돌아가기로 변경되자 공일날마다 홍수같이 밀려드는 놀이차(車)와 함께 우리 집 뒷길은 종로바닥 이상으로 통행수가 많아졌다.
한 차가 달리고 난 후 일어나는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뒷차가 또 따라오고, 놀이차하며 버스하며, 정릉 깊숙이 집을 짓는다고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트럭하며, 게다가 합승택시까지 그칠 줄 모르고 차들이 신나게 달린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가 집을 뒤덮어 집사람은 온종일 걸레를 들고 있어야만 하게 되었다.
옛날 국민학교 시절에 우이동이니 진관사니 교외로 원족을 가다가 길갓집 들 지붕에 먼지가 덮인 것을 보곤 어린 마음으로도, 『원 저런 집에서 어떻게 사나!』하고 혼자 중얼거리던 내가 마침낸 이런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안국동에서 동대문으로, 동대문에서 안암동으로, 안암동에서 돈암동으로, 그리고 돈암동에서도 못 지탱하여 미아리고개를 넘어 정릉으로 오게 되었을 때도, 학교 시절에 아래를 보고 살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너무 효과가 있었는지 나는 별로 슬픈 줄을 몰랐다.
토박이 서울 사람들이란 원래 생활능력이 없는 법이라 생각하고, 혼자 위안을 하였다.
그러나 이 먼지엔 정말 당황했다.
나야 아침만 먹으면 내 직장으로 피난을 가 학교 넓은 운동장에서 좋은 공기도 마실 수 있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은 二十四시간을 이 먼지구덩이 집에서 살아야 하지 않는가!
물론 일은 간단하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여러 번 이사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사를 가장 주장한 사람은 아내보다도 나였다.
그러나 이 집을 팔았대야 소개료, 밀린 주택할부금, 이사비용들을 빼면 적어도 10여만 환이 부서질 것이고, 그 뿐 아니라 우리가 피난 갔다 서울로 돌아온 후 몇 년 동안 우리를 우로(雨露)에서 보호해준 이 집을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는 어린 아이들의 순정적인 의견도 있고 해서, 결국 먼지가 나더러도 이 집에서 참자고 결정되었다. 그리고 먼지와는 싸워 보자고 했다.
이때부터 이름도 괴상한 반진투쟁(反塵鬪爭)이 시작되었다. 먼저 집 둘레에 육척이 넘는 판장(板墻)을 했다. 우선 차들을 눈으로 보지 않는 것만 해도 훨씬 나아졌다. 허지만 먼지는 판장을 넘어 전에 못지않게 집을 뒤덮었다.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어도 오관(五官)으로 먼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비오는 날이 제일 반가운 날이었다. 비가 오면 우리는 유리창 문을 다 열어 놓는다. 날이 개면 거꾸로 문을 닫아야 한다. 공일날이면 남들은 하루의 휴일을 즐기려하여 날이 개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비가 오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무리 늦어도 집이 나무로 된 부분 –마루, 문, 문지방 등-을 꼭 한 번 닦는 것이 습관으로 되었다. 흙, 시멘트로 지은 후생주택이라 나무로 된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아 뵈어도 전부 닦자면 근 한 시간이 걸린다. 이렇게 한 번 닦고 나서야 코 속에 먼지가 안 들어가는 것 같아 책을 읽든지 잠을 자든지 할 수 있다.
판장(板墻)을 따라 분수대(噴水臺)를 만들어 놓고 온종일 물을 뿜게 하면 보기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이상 훌륭한 방진법(防塵法)이 없을 게다. 그러나 그것은 중동지방의 어느 왕실(王室)에서나 할 것이지, 정릉 후생주택엔 어울리지 않아 못 하겠다. 아무리 궁해도 돈이 없단 말은 안 하니 걱정이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나는 이웃의 어느 집 울타리 밖에 해바라기가 나란히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해바라기들은 울타리보다 훨씬 키가 컸다.
먼지에 시달리고 밤낮 먼지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언뜻 해바라기를 울타리에 따라 나란히 심어 놓으면 훌륭한 먼지방패(防牌)가 되리라 생각을 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 우리는 예정대로 판장을 따라 해바라기를 심은 것이다.
해바라기들은 자기네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잘 자랐다. 한 줄기에 탐스러운 누런 꽃이 여러 개씩 달려 이웃에 모시고 있는 <백치(白痴) 아다다>의 계용묵(桂鎔默) 선생님 사모님이『댁의 해바라기는 어쩌면 그렇게 잘 자라지요! 정말 신기해요!』라고 까지 칭찬해 주실 정도다.
해바라기는 키가 부쩍 커 판장을 훨씬 넘어서도 잎사귀가 부채처럼 크다. 이 부채잎사귀가 먼지를 막아 준다. 저녁때가 되면 하루 종일 먹은 먼지로 잎은 하얗게 된다.
나는 요샌 밖에 나갔다 오기만 하면 우리 대신 먼지를 먹은 해바라기 잎사귀 하나하나에 정성껏 물을 뿌려 준다. 물을 뿌릴 적마다 느껴지는 그 감사한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왕궁(王宮)을 상징하는 듯한 그 커다란 위엄 있는 꽃 해바라기를 이런 목적에 사용하는 나를 맘껏 꾸짖는다.
우리 집 먼지 문제는 해바라기 때문에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해바라기는 우리 때문에 자꾸만 시들어간다. 자꾸만 고개를 수그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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