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近畿旅行

近畿旅行(95): 노작 홍사용(하) 고향 돌모루

맑은공기n 2021. 7. 29. 16:21

경로: 4.94km

큰재봉~석우천~오산천~반석산~묘소~옛 집터~노작 홍사용 문학관

 

노작 홍사용(199~1947) 선생의 출생지는 용인군 용수골 이지만 출생 백일 무렵 대한제국군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 재동으로 옮깁니다. 1907년 정미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주봉산(朱鳳山) 먹실(墨谷)로 이주해 17세에 휘문의숙 2학년으로 편입할 때 까지 천석군 커다란 집에 독선생을 두고 한학에 정진하셨습니다.

 

화성시 석우리(石隅里 돌모루)는 행정구역 개편 전 까지는 수원시 관할이었기에 선생은 수원사람으로 알려졌고 휘문고보 1년 후배로 활발히 교유한 역사소설가 월탄 박종화(1901~1981) 선생도 수원의 돌모루 홍사용으로 기리셨습니다. 이런 연유로 선생은 화성시, 수원시, 용인시 문인들로부터 고향의 문학·예술인으로 똑같이 사랑받습니다.

 

산마루 돌아서 가는 마을이라는 뜻의 돌머루(石隅里 석우리는 한자 음차) 탐방에 앞서 일정을 고심하였습니다. 청명지맥(淸明支脈) 등산, 노작 문학탐방을 결합해 선생의 발자취 가득한 큰재봉에서 석우천·오산천 따라 주봉뫼(반석산)를 산행한 다음 불당골 묘소 참배, 선생의 성장지인 먹실 구기(舊基)와 문학관 방문 일정으로 엮었습니다.

 

선생의 시에 등장하는 뒷동산이 반석산(盤石山 122.3m)입니다. ‘-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라고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읊으셨습니다. 석우리 분들은 주봉산이라 불렀는데 동탄 신도시가 탄생하며 반송동과 석우동의 앞 글자 하나씩 빌려 반석산이 됐습니다. 주봉뫼 이름을 아낀 선생이 아셨으면 섭섭하셨을 겁니다. ‘

 

나무가 없어 선생이 봉독두옹(峯禿頭翁)이라 묘사한 큰재봉(101.4m)은 지금은 나무가 울창합니다. 큰재봉에서 한림대 성심병원 옆 도로 따라 가면 선생의 출생지인 용인 용수골입니다. 산길로 걷고 싶으면 큰재봉~ 성심병원~ 한전 변전소 뒤 동학산 공원으로 해서 매미산 아래 용수골로 이어지니 용수골과 돌머루를 연결하는 청명지맥 선상의 큰재(峴)가 맞습니다. 용수골에서 시작해도 뜻 깊은 코스입니다.

 

먹실 뒷집 노마나 1919년 삼일독립운동 시위로 수감되었다 함께 풀려나 석우리에서 은신한 휘문고보 학우 정백(1899~1950)과 통발 걸어 붕어 잡던 석우천 지류 냇가인 현량개(賢良浦)는 동탄신도시 개발로 매립됐습니다. 본명이 정지현(鄭志鉉)인 정백(鄭栢)선생은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로 19273월 상해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합니다.

 

광복 후 재결성된 조선공산당의 거물로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1년 전 전향했다는 죄목으로 서울에서 정치보위부에게 총살당합니다. 노작 선생의 휘문고보 1(통회 10) 동기 64분 가운데는 한국 역도(力道)를 개척한 서상천, 영화감독 석영 안석주, 서양화가 윤희순 등등 다재다능하고 안온한 분들이 계신데 풍운아(風雲兒)와 절친 이었다는 사실이 뜻밖입니다.

 

큰재봉, 반석산을 오르고 내리며 노작 선생에 관한 여러 생각을 합니다. 1,400석 대지주 전재산을 문학예술활동에 아낌없이 쏫아부은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선생은 문우(文友), 백조(白潮) 창간이나 극단 토월회(土月會) 운영에 관여한 이외에는 향락에 빠졌다는 말도 없습니다. ‘일설에는 독립군의 자금으로 쓰였다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출처: 김학동저 노작 홍사용평전 25

 

본인의 친구로 휘문고 58회 동창인 홍승갑군은 노작 선생의 7촌 조카입니다. 승갑군에게 노작 선생에 관해 집안에서 혹시 들은 바 있냐고 문의하니 조부님이 노작 선생과 사촌지간으로 아주 친했으며 큰댁은 부농(富農)이었는데 노작선생이 공부하랴 문학·예술 활동으로 가산을 없앴다고 합니다. 승갑군은 동탄신도시 조성으로 고향을 잃었다고 늘 아쉬어 하곤 합니다.

 

반석산 불당골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먹실 구기(舊基)와 문학관을 탐방합니다. 먹실(墨谷)은 돌모루에서도 외진 곳으로 나무가 많이 우거져 낮에도 어둡고 컴컴했다는데 호텔이 들어섰을 정도로 번화합니다. 문학관 전시실 흑백사진 한 장 앞에서는 충격입니다. 쓰러질 듯 초가(草家)가 선생의 가족이 살던 집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가족들이 말년에 겪은 극심한 가난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문학관을 떠나 높은 빌딩들이 길게 늘어선 동탄 1신도시 노작로(露雀路) KT삼거리로 돌아서 뒤돌아보니 먹실 옛 집터 위로 여름 볕이 환히 쏟아집니다.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선생과 가족들에게 뜨거운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조언 주신 노작 홍사용 문학관 사무국장 허민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

주소_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   (전화 031-8015-0880)

홈페이지  노작홍사용 문학관 (nojak.or.kr)

 

일정:

08:18 한림대병원·동탄이마트 버스정류장

08:24 큰재봉 사거리/0.35km

08:29 큰재봉/0.70km

08:55 석우리천 지천(支川) 하산/1.6km

09:09 나래교/2.55km

09:30 반석산 산행 시작/3.49km

09:43~09:49 팔각정/3.97,km~3.99km

10:01~10:12 불당골 노작 묘/4.61km~4.71km

10:19 먹실 옛 집터(석우리 492번지), 노작 홍사용 문학관/4.94km

 

참고자료:

홍사용평전 (새문사 2016): 김학동 저

華城 石隅里 먹실遺蹟 (2007): 韓國土地公社

화성문화원: 지명유래

동연록(同硯錄): 2001 휘문교우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정백

[허행윤의 문화산책] 수원화성신문 2020.01.16:

겨레를 사랑한 시인 홍사용, 그의 숨결이 남아있는 노작로를 찾다

 

↓휘문고보 학생  홍사용  *출처 노작 홍사용 문학관:

걷기 시작한 큰재봉사거리:

큰재봉 오름길:

큰재봉 정상에서:

큰재봉은 공원:

석우지천으로 하산(선생이 붕어 통발 놓은 현량개가 이런 모습의 개천 이었을것으로 추측):

나래교 부근에서 보는 반석산(주봉산)/우측 산 줄기 끝 부근에 묘소·집터·문학관: 

나래교 부근에서 뒤 돌아 본 큰재봉:

석우지천들이 합류한 석우천:

석우천 생태길:

 

석우천에서 오산천으로 합류지점에서 오산천 산책로 시작:

오산천 넘어는 동탄 2신도시:

오산천 산책로에서 우측 반석산 등산로 입구:

정상까지 350m:

정상 팔각정:

노작 홍사용 문학관으로 하산:

내려오다 홍사용문학관 방향 표시:

하산하다 보면 묘소 입구:

 

묘소 아래 노작 선생 (추정) 옛 집터 석우리 492번지 일대:

옛 집터에 작가연보로 기념:

시비: 1923년 개벽 37호 수록 '해 저문 나라에'

옛 집터, 석우리 492번지 *출처_ 김학동 홍사용 평전 37쪽

달라진 옛 집터와 주변 풍경(우-라마다 호텔, 좌_문학관):

홍사용 문학관 탐방/아래 사진들은 문학관내 전시물 촬영: 

朱鳳山(주봉산)으로 명기한 육필 원고:

백조 창간호:

노작 작품 수록집:

9촌 홍호선(휘문고보 동기)에게 보낸 장문 서간:

1976년 시와 산문집 '나는 왕이로소이다' 출간: 

수원의 돌모루 홍사용, 글 박종화:

1935년 추정 토월회(정중앙 정장 노작 선생):

장남 결혼식(춘원 이광수 주례):

가슴 아프게 한 노작 선생 말년의 움막 수준 초가/이런 처지에서도 일제에 저항셨습니다:

경인일보_ 대쪽같은 선비성품 철저한 배일:

한국일보_ 백조, 동인, 신극 운동에 천석 재산 바치고 붓꺽은 저항 방랑으로 달래: 

문학관 앞 노작로(옛 먹실):

kt삼거리 우측 숲에 문학관, 노작 선생 묘역,구기(舊基):

노작 선생 7촌 조카 홍승갑형과 함께(2016년 옥천 정지용 문학관): 상단 톱사진 선생과 비슷한 풍모!

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