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 지낸 갈평고담, 수몰과 함께 역사속으로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2011.09.09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⑦:
△ 군북면 석호리 입구 ~ 무넘이골 배터 ~ 배편 대청호 횡단 ~ 군북면 용호리 ~ 용호리 임도 ~ 장고개 ~ 안내면 답양리 양지골 구간 약 9.4km
여울 지명은 사실 부르는 사람마다, 마을마다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톡여울이라고 불렀던 이 여울은 세 개의 여울이 합쳐진 삼밭여울이라고도 불렀답니다. 특히 이 여울이 유명한 것은 군북면 용호리(1973년까지는 안내면 소관) 용호소(회일늪, 갈평고담(葛坪古潭))라는 깊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호소는 군북8경 중 제4경으로, 용담석경(龍潭夕景)이 꼽힐 만큼 경관이 아름다웠던 데다 가뭄이 들면 옥천군수가 직접 나와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제는 행정마을조차도 잃은 수몰 마을 용호리에서 벌초를 위해 고향을 들른 이들에게서 묻어나는 아련한 향수를 느낀 여울길이었습니다. 8월27일 여울길에는 산수원산악회 곽정순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다수 참가해 일행을 이끌었습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의 안내와 조사,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의 대청호 어부 손학수(군북면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씨의 옛 얘기로 여울을 느꼈습니다.

▲ 군북면 용호리를 향한 배 위에서 본사 이안재 대표와 석호리의 어부 손학수씨, 정수병씨(사진 왼쪽부터)가 주변을 둘러보며 수몰 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여울길은 군북면 석호리 삼거리에서 조금 걸은 후 여울이 있던 장소에서 배를 타고 용호리로 건너기로 했다.
석호리 '무넘이골'. 물이 넘는 골짜기다. 석호리 삼거리에서 진걸마을로 걷다가 청풍정이 바라보이는 길 위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무넘이골이다. 대청호가 생기기 전에는 골짜기였겠지만 지금은 수면과 높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해발은 80m에서 85m 사이다. 대청호 계획홍수위가 80m이고, 상시만수위가 76.5m이므로 물이 조금만 더 들어차면 물이 넘을 듯도 하다. 대청호가 생기기도 전에 불렀던 지명이니 아마도 선견지명이 아니었을까?
무넘이골 배터에서는 금강 건너로 용호리 용호소가 있던 자리가 빤히 보인다. 건너편은 용호리 땅이다. 진걸 마을에서 출발한 손학수씨가 탄 배가 도착한다.
"이 여울은 상류에서 하류까지 1.5km 정도로 넓었어요. 여울이 넓다 보니까 맨 위는 도톡여울, 중간에는 약수여울, 세 번째는 무넘이여울이라고 불렀고, 세 개 여울을 통틀어서 삼밭여울이라고 불렀어요."
손학수씨가 여울 얘기에 나선다.
"이 여울로 그때만 해도 담배를 많이 재배했는데 소 질마로 실어나르고, 그랬지. 나는 담배따기가 싫어서 다른 데로 도망을 가버렸어(웃음)"
바로 강 건너 회일늪에 대한 얘기가 빠질 수는 없다.
워낙 유명한 얘기인데다 옥천군에 가뭄이 들면 군수가 직접 와서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군북팔경 중 4경이던 용호소 풍광
손학수씨의 기억에 의하면 회일늪은 이무기가 살고 있고, 어른들로부터 명주실을 풀어 넣으면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수심이 깊은 곳이라고 들었다 했다.
젊은 시절, 그래서 한 번은 직접 연못에 들어가 보았다. 수심이 5m는 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려갈수록 물 속 온도는 매우 낮았다. 물이 냉장고였다는 표현을 할 정도. 가물치와 메기, 뱀장어 등이 많았지만 이무기가 살았던 곳이라든가, 실 한 타래가 들어갈 정도로 깊은 곳이라는 얘기는 다 거짓말이라고 허허거린다.
기우제는 옥천군수가 직접 주관을 했는데, 박찬웅 군의회 의장의 기억에 따르면 연못의 양쪽에서 새끼로 꼰 동아줄로 물을 쳐서 흙탕물을 만든 후에 기우제를 시작했다. 이후 연못 물을 키에 떠서 까불며 기우제를 지냈다는 것. 기우제는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윽고 배는 출발해 석호리 앞에 쳐놓은 부유쓰레기 차단막 한가운데를 뚫고 용호리로 향한다. 용호리 옛 배터에 내린 일행이 들어선 길에 펼쳐진 것은 갈대로 수놓아진 길. 갈대 사이를 걷는 기분도 그만이다.

▲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에서 배를 타고 용호리에 도착한 참가자들이 허리까지 찬 풀을 밀어내며 마을로 향하고 있다.
용호리 하면 꽃산이 유적과 방개 유적까지 구석기 유적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비록 대청호 수몰로 인해 마을이 없어졌지만 사람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고향 용호리로 산소 벌초를 온 사람들이 반기는 목소리에서 향수를 느낀다. 청주에 산다는 한 출향인도 용호리 길로 여울길을 걷는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며, 오랜만에 마을 옛 지명을 입에 올린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다.
100가구에 이르렀던 용호리가 수몰된 후 지금 남은 집은 대여섯 가구. 마을 앞에 선 선돌과 용호리 마을비, 600년 역사를 가르쳐주는 파주염씨 사당인 '용강사'가 용호리 존재를 확실하게 해준다.
용호리는 금산, 군서를 휘돌아 환평, 추소리를 거친 서화천이 비로소 금강 본류에 합류하는 곳이다. 군북면 이평리 갈마당과 용호리를 잇는 합수머리에는 옛날에는 모래가 쌓여 삼각주가 있었고, 사람들이 건너다녔던 그 여울은 갈마당여울이라고 했다.
당시 갈마당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석호리 손학수씨는 이평리 공곡재에 가서 지네를 잡았고, 처녀들은 고사리를 꺾는 원정길을 다니기도 했던 여울이다.
마을을 지나 장고개로 가는 임도. 수몰 후 20년 가까이 지난 1999년에야 막지리로 넘어가던 장고개에서 용호리로 들어가는 육로가 뚫렸다. 파주염씨 문중 사람들의 숙원이었던 임도는 산소를 찾는 길 뿐만 아니라 대청호 둘레길을 순례하는 이들의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에 참여한 30여명의 주민들이 군북면 용호리 마을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수몰 한 전해주는 용호리 마을비
용호리 마을 앞에 서있는 용호리 마을비는 이 곳에 대대로 살던 파주염씨를 중심으로 마을 역사를 한 눈에 알도록 쓰고 있다. 수몰의 한을 느낄 수 있는 절절한 글이라 마을을 지나는 이들마다 한 번씩 읽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2007년 마을비를 세울 당시 염시균씨가 지은 비문에는 파주염씨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안내면 용호리가 1973년 군북면으로 편입됐으며, 수몰 전 안말, 쑥말, 새말에 방개까지 100여호가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갈평고담(용호소, 회일늪)이라는 영험한 늪이 있어 옥천군수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사실, 기름진 땅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화일 무를 비롯해 콩, 감자, 담배와 누에까지 각종 특산물의 보고였는데 1978년(대청댐 완공은 1980년) 수몰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돼 이제는 꿈같은 얘기가 되었다며 애석해 한다.

▲ 이번 여울 행사에는 3대가 함께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사진 왼쪽부터 이용민군과 어머니 이수진씨, 용민군의 할머니 박덕분씨와 이모할머니 박덕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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